사물의 뒷모습 / 안규철

전시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와 책 ‘아홉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이후 계속해서 찾아보게되는 예술가. 이분에게 글은 예술 활동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도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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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가 없는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쩌면 개인을 명목상의 주어의 자리에 앉히고 실은 영원히 무언가의 목적어로 살게 하는 세상인지 모른다.
진정한 주어가 없는 세상. 누구도 주인공이 아닌 세상. 욕망이나 두려움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유일한 주어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상.
/이름에 대하여
예술가란 죽은 이름들, 낡고 더럽혀진 이름들을 지우고 아직 이름이 없는 것들, 새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낯선 것들의 이름을 새로 쓰는 사람이다. 예술가로서 이름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이름들을 부르느냐가, 그 호명이 한낱 잡담과 소음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소음에 대하여
소리의 총량이 끝없이 증가하고 허용되는 고요함의 공간, 정적의 총량이 끝없이 감소하면 소리들은 의미가 되지 못한 채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대한 잡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더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무의미한 말을 줄이고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실패하지 않는 법
그는 결국 실패 자체를 자신의 목표로 삼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만약 그가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목표로 하고 그 계획대로 실패한다면, 그 실패는 그가 경험하는 최초의 성공이 될 것이다. 반대로 그가 여기서 또 다시 실패한다 해도 그는 이중의 실패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에 도전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운명은 스스로 실패를 자초함으로써 자신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인간이 있을 줄은 아마 꿈에도몰랐을 것이다.
누군가 끄는 걸 잊어서 불이 켜있는 가로등처럼 어색한 모습으로 미술계라는 곳에서 서성거리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제는 하루하루 내가 무엇을 하기에 아직 은퇴를 하지 않는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